‘정치’가 난립하는 시대의 표현의 자유

서울 석관동에 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연출전공 3학년. 트위터 @mkmodus
BY : 홍명교 | 2012.03.07 | 덧글수(0) | 트랙백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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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대상으로서의 정치

오늘날은 표어로서의 ‘정치’가 난립하는 시대다. “닥치고 정치!” 지난해 서점가를 휩쓴 위 책은 팟캐스트 방송 ‘나는꼼수다’와 김어준의 인기에 힘입어 그렇게 된 측면이 있지만 단순히 그 인기 덕택에 ‘정치’가 우리들의 타임라인을 장악했다고 말하기에도 모자란 점이 있다. 최근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 같은 야권 정당에서 행해지는 청년비례대표 경선의 경우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슈스케 방식’의 경선제를 도입해 누구나 정치인으로서의 도전에 응할 수 있는 모종의 콘테스트를 도입하겠다는 것이 그 취지인데, 여기에 수백여명의 청년들이 참여해 자신이 왜 국회의원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열성적으로 선전했다고 한다. 기대와는 달리 다소 김빠지는 선전성 요식 행위로 전락한 이 ‘빅이벤트’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내려지는가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정치’를 주제로 삼은 이벤트가 이렇게 대중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상황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갑작스러운 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군부독재의 몰락으로 수렴되고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래 가히 ‘이념의 종언’이 선언될 정도로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를 사로잡는 정치적 쟁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1990년대 내내 이어진다. 물론 여기에는 세계적인 경제호황이 그 배경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미국 등 중심부 국가들의 유래 없는 호황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미국이나 영국처럼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만이 ‘잘 먹고 잘 사는 길’이라는 모종의 환상이 기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소비주의적인 문화의 확산은 지난날 민주주의 수호나 사회 변혁이라는 정치적 열망이 놓여있던 저항적인 대중 주체들의 자리를 ‘소비하는 주체’를 위한 자리로 교체하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열망을 실현하는 것을 어떤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밑바닥의 ‘정치’를 구현하고 고민하는 것에 인색하고 냉소하게 되었고, 제도권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도 지독하게 혐오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실제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의 정치인들이나 행정관료들이 대중 자신의 정치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기대와 실망의 인과관계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제도정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는 것 자체, 혹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지독하게 혐오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여의도 그 자체가 ‘정치’라는 기표의 대체어가 되었고, 누군가 관계들에 있어서 모종의 개입을 시도하는 이런저런 시도들에 대해 “너는 정말 정치적이구나!”라는 힐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또 어떤 공동체의 ‘장’을 맡거나 무엇을 주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모든 적극적인 사람들에게 “너 정치하려고 그러니?”라는 냉소적 질문도 덧붙여졌다. 요컨대 무언가 공동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순수한 제스추어조차도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정치’는 한동안 혐오의 대상이었다.

뒤집어진 상황

그런데 과거의 이런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뒤집어지고 있다. 어느 새인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더니 거리에는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집어든 시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개그맨들은 개그프로그램에서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를 주제로 삼아 정치풍자개그를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된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면 개그맨 최효종의 국회의원들을 향한 퍼포먼스에 한 보수 국회의원이 ‘명예훼손’이라며 고소로 응대했던 일이었다. 둘 중 누가 개그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정치인들은 개그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심한 종자들로 전락한 것이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SNS를 사용하는 시민들을 필두로 한 정치적 열망의 제스추어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무시 못 할 거대한 흐름이 되어 각종 논쟁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장시키고 있다. “닥치고 정치”나 나꼼수 열풍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정치의 흐름은 어느 정도 새로운 방식의 ‘실천양태’를 만들어내며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들이 여론을 확장시키는 과정, 제도권 정당 경선으로의 참여 등의 열풍 현상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쉽게 목격되기 힘들던 모습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한 변화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각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서 실제 정치를 위한 ‘공간’이 작게나마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새로운 정치’의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열성적 시민들은 단지 총선이나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에만 정치의 의미를 국한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국회에서의 권력 교체가 어떤 정치적 가치가 교체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선거 때만 되면 SNS를 중심으로 촉구 받는 투표에의 참여와 젊은 세대의 투표율 증가 현상만을 두고, “드디어 ‘시민정치’의 장이 열렸다!”고 평가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실제로 5년이나 4년에 한 번 투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어떤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의 의미를 복원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 삶을 결정짓고 재구성하는 가장 중대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굳이 정치의 의미를 선거일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자고 외치는 것이나 “투표를 하고도 두 눈 똑바로 뜨고 그들이 우리 뜻대로 하고 있는지 지켜봅시다”라고 말하는 것 안에 가두어둘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직 발견되지 못한 ‘정치’의 의미를 찾아나가는게 우리 자신을 세계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나서게 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진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미발견된 정치의 영역이란 어떤 것일까?

‘정치’란 무엇인가

숲속에서 홀로 도를 닦고 풀을 뜯어먹는 기인이 아니라면 현대인은 누구나 다사다난하게 돌아가는 세상만사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관계의 문제를 떼어놓고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들의 삶에서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는데, 정치란 바로 그렇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립과 분쟁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한 나라 안에서 위로부터의 ‘통치’만이 국한되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항쟁이나 그 밖의 다양한 활동들도 포함할 수 있다.

헌데 정치는 단지 이렇게 ‘국가’만으로 한정되는 활동들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형태들, 예컨대 회사나 교회, 학생회, 동아리, 노동조합, 학교, 가정 등 어디에서나 발생되는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의견의 차이를 조정해 나가는 통제의 작용이기도 하다. 만약 국가라는 관계가 ‘공적인 가버먼트(government)’라면 그 밖의 다른 관계들은 ‘사적인 가버먼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삶 그 자체에서 ‘정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찌보면 인간의 모든 관계맺음은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아무런 갈등조차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매우 순수한 봉사활동이나 사랑하는 연인관계에서조차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정치’라는 기표에 대해 구태여 과도한 노이로제 반응을 보일 필요 없다. 도리어 이를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이 ‘정치’에 대한 강박증적 거부나 집착적인 천착의 극단적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무이하게 진지한 태도라는 것이다. 어쩌면 최근 들어 “닥치고 정치”로 표상되는 팬덤적 현상으로서의 ‘정치 과잉’의 흐름은 정치에 대한 강박증적 거부의 반대편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자”라는 슬로건으로 표상될지언정 사실은 그 어떤 ‘정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가장 크게 조건 짓는 노동의 문제나 일상에서의 관계맺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 제도권 정치에 대한 극단적 열의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런 정치 과열 현상이 단순히 ‘투표’에만 국한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이런 열의가 투표 이후의 다른 경제적, 역사적, 제도적 상황과 후과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하는 태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중립이란 가능한가

물론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극심하게 우리를 옥죄는 정치에 대한 반편향은 여전히도 ‘정치’ 그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노이로제적 거부를 보이는 태도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적 중립’에 대한 모종의 신학이 바로 그런 태도일 것이다.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냉소적인 주체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는 자신은 어쨌건 ‘중립’이라는 전제를 두는 것이다. 논쟁이 판가름하는 입장의 차이들을 드러내길 두려워하고 그것에서 무언가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싸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치자. 이런 사안에 대해 재벌들이나 매스미디어가 취하는 가장 일반적인 태도는 그것이 기업의 회생이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옹호론이다. 이에 반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 혹은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정리해고제가 기업의 경영자나 자본가가 야기한 경영상의 위기를 결국 그곳에게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가지 입장을 넘어서서 보다 더 일반적인 태도가 있다면 바로 “나는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겠다.”며 자신의 명확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것은 곧 자신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사회적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과연 중립적인가, 라고 되물을 수 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문제나 쟁점에 대해 그 어떤 입장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그런 시스템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전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상황이 한쪽 방향을 향해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수면 아래 감추어진 갈등들을 드러내길 두려워해선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철저하게 내부화되고 봉쇄되어있는 갖가지 열망들이 분출되고 발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정치적 입장이 과연 올바른 우리 자신의 순수한 의지에 따라 구성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런 정치적 순수성에 대한 환상이 우리가 직면할 두 번째 장벽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에 대해 어렴풋이 갖고 있는 내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대체 뭐가 옳은거지?”라는 상념이 우리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그런 무수한 질문들에 대한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제시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입장이건 모종의 이데올로기 범주 안에서 산출되는 것임을 직시할 순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식의 거시적인 방향성을 갖고 있고, 그 틀 안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된다. 문제는 그 거시적 틀마저도 우리가 살아오면서 가족으로부터, 학교 교육으로부터, 매스미디어로부터 끊임없이 주입받아온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미 원했든 원치 않았든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인 동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국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한국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이자 가장 대중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침묵은 그 자체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조’가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작가 김훈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우리는 일상적 피곤함을 느낀다. 더군다나 한국사회는 이런 식의 질문을 통해 구성되는 진영논리가 극심하게 과잉된 사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유하고 비판하는 것보다는 아예 속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쪽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게다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어떤 진영 논리 속에서 개인들의 삶이 피폐화되었던 역사적 피로감이 이런 냉소주의를 더 극심하게 부추겼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의 표현의 자유란 존재하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실천을 그만 둔 채,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유지하기 힘든 ‘잔혹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35명이 자살하고 비정규직 비율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슬픈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인 노동 분할과 중첩되어 여성들의 노동을 더 2중적 고통으로 전락시키는 가부장제적 문화라든지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제약하는 비상식적 국가보안법 등 다양한 사회적 억압들이 상존하는 갈등의 장이 바로 한국사회이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 농성을 이어가는 김진숙씨에 대한 연대를 위해 ‘희망버스’를 제안했던 송경동 시인은 전사회적으로 ‘희망버스’를 요청했다는 이유 하나로 구속되었었다. 그의 구속과 동시에 출간된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에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담대한 소회가 드러난다. “아무튼 이래저래 다시 얼마 동안은 국민 세금을 축내며 부산의 구치소 신세를 져야 하나 보다.” 절망하지말고 희망을 꿈꾸어보자는 사소한 요청이 감옥 갈 이유가 되는 시대가 바로 우리 사회인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면 감옥에 갈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리해고에 직면한 노동자들에게 그런 침묵이나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합리주의적 제스추어일랑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정리해고제나 비정규직 양산의 문제가 우리 사회 전반적인 문제가 되어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회당 당원이기도 한 박정근씨는 트위터 상에서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초유의 사례가 되었다. 그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인터넷 선전매체 트위터 계정 멘션들을 ‘장난으로’ 리트윗(retweet)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었다. 김정일의 죽음이나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풍자적 농담을 했던 것조차도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의 위반 사항으로 남겨졌다. 이것은 과거 박정희 군부독재시절 택시 기사 앞에서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 하나로 구속되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사상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사회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우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그 자체가 범죄가 되는 모순적인 사회이다. 소비나 유흥 등에 있어서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면서도 어떤 근본적인 표현의 차원에서는 자유가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진짜 자유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대학교에서는 졸업전시회를 준비한 한 미대생이 호모포비아적 표현으로 채워진 졸업작품을 전시해 논란이 일었었다. 이에 대해서는 과연 그런 표현도 ‘자유’라는 명목으로 옹호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당장 이 학교에서는 학생사회 내부의 논쟁으로 그런 호모포비아적 표현은 옹호될 수 없는 종류의 ‘표현’이라고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 상에서 논란이 일었던 ‘나꼼수’에서의 여성에 대한 대상화된 말들은 어떤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정리되었다. 사실 이런 식의 여성에 대한 상품화의 시선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비일비재해서 매우 당연한 권리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옹호해야하는, 역사적으로 인류가 옹호해온 자유의 개념이 그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면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공동체적 합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라면, 우리는 그런 폭력에 대해선 명백히 ‘반폭력’의 관점으로 일관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누빔점을 위해

우리 사회는 정치 혐오의 시대에서 정치 과잉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라는 기표의 과잉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 중립에 대한 기이한 환상에 기대어 모종의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이런 정치적 중립은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장악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환상일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립이나 침묵을 고수하는 태도는 결국 지배이데올로기에 의지 없이 동조하는 제스쳐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수한 관계맺음과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한국사회는 여전히도 전근대적인 표현의 억압과 폭력을 가할 자유가 용인되는 극단적 편향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기형적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좀 더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더 적극적으로 옹호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실천들에 주목해야 한다. ‘제도정치’에 국한된 저 오래된 정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속에 ‘정치’를 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행동만이 다른 세계를 여는 새로운 누빔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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