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위성방송의 영화편성PD로 밥벌이를 하는가 싶었지만 글을 쓰고 싶은 욕망에 돌연 잡지사 기자로 변신. 하지만 그것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영화로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내 재능의 저주와 한계만을 여실히 느낀 채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힘.
BY : 이영규 | 2011.12.02 | 덧글수(0) | 트랙백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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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영광’이라는 시인에 대해 알게 됐다. 계기는 그의 시집 ‘아픈 천국’을 접하면서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제목에 끌려 시집을 샀는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에 아른 걸이는 죽음의 형상화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고단한 서민들의 생을 노래한 것이다.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삶의 간극에서 오는 고통의 모습은 죽음과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찬은 “‘두려운 낯섦’이나 ‘보이지 않는 것’, 곧 ‘유령’의 ‘몸’이란 새로운 이미지의 창안을 통해 한국시 전체의 사회정치적 상상력을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든다”면서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시작하면서 예견했던 저 오래된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한 유령이 우리 시대 한국문학을 떠돌고 있다-‘아픈 천국’이라는 한 유령이”라고 상찬했다. 시보다 더 어려운 해설이지만, 일단 시를 접하면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될 것이다. 가령, 유령이 되지 않도록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를 노래한 ‘유령1’을 읽어보라.

이것은 소름끼치는 그림자,
그림자처럼 홀쭉한 몸
유령은 도처에 있다
당신의 퇴근길 또는 귀갓길
택시가 안 잡히는 종로2가에서 무교동에서
당신이 휴대폰을 쥐고
어딘가로 혼자 고함칠 때,
너무도 많은 이유 때문에 마침내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질 때
그것은 당신 곁을 지나간다
희망을 아예 태워버리기 위해 폭탄주를 마시며 당신이
인사불성으로 삼차를 지나온 순간,
밤 열한 시의 11월 하늘로 가볍게
흩어져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순간
당신에겐 유령의 유전자가
찍힌다, 누구나 죽기 전에 유령이 되어
어느 주름진 희망의 손에도 붙잡히지 않고
질척이는 골목과 달려드는 바퀴들을 피해
힘없이 날아갈 수 있다
그것이 있는 한 그것이 될 수 있다
저렇게도 깡마르고 작고 까만 얼굴을 한 유령이
이 첨단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니
쉼없이 증식하고 있다니
그러므로 지금은 유령과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
지하도로 끌려들어가는 발목들의 어둠,
젖은 포장을 덮는 좌판들의 폭소 둘레를
택시를 포기한 당신이 이상하게 전후좌우로
일생을 흔들면서 떠오르기 시작할 때,
시든 폐지 더미를 리어카에 싣고
까맣게 그을린 늙은 유령은 사방에서
천천히,
문득,
당신을 통과해간다

소름끼치지만, 도처에서 배회하는 유령의 흔적들. 바로 주변부로 밀려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당하는 사회의 마이너리티의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더 슬픈 건 알다시피, 그것이 폭압적인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 ‘유령3’에서 시인은 다시 말한다.

계획적(計劃的)으로
즉흥적(卽興的)으로
합법적(合法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전투적(戰鬪的)으로
착란적(錯亂的)으로
궁극적(窮極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아, 결사적(決死的)으로
총체적(總體的)으로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죽은 자는 여전히 실종(失踪) 중이고
농성(籠城) 중이고
투신(投身) 중이다

유령(幽靈)이 떠다니는 현관(玄關)들,
조간(朝刊)은 부음(訃音)같다

-‘유령 3’ 일부분

여기선 독음을 달았지만, 페이지엔 낯선 한자어로 써서 죽음조차 죽음으로 인지되지 않는 현실을 시각화했다. 알고 보니, ‘유령 3’은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을 노래한 시였다. 죽었지만, 죽어서도 죽음에 응분할 수밖에 없는 아픔들. 이영광 시인은 새삼 나에게 여전히 우리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그리고 더 절실하게 다가온 말은 그의 마무리 인사였다. 그는 시인의 말에 썼다. “좀처럼 끝장나지 않는 내일들에 의해, 종교적으로 나는 산다.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아니,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잊지 않은 광신도처럼. 뜨겁고 고요한 대낮을 지나 전쟁 같은 헛소리의 세계로”라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도 ‘좀처럼 끝장나지 않는 내일들에 의해’, 역설적으로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 하더라도 뭔가 기대하며 산 것 같다. 하지만 역시 희망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다시금 상기되는 건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는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구절이었다. 말 그대로 희망은 어찌 그토록 강렬하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결과적으로 ‘아픈 천국’ 시집에서 가장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시는 ‘극단적인 바람’이었다. 전문은 이렇다.

한때는 젊어 전태일이나 게바라 같은 죽임당한 생을 흠모했는데
덜덜 떨던 순수의 시절은 죽고,
전날 밤 술자리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흐리멍덩한 인간 덩어리로 늙고 있다
설사를 내리고 와도 꾸르륵대는 뱃속,
조간은 온통 살인의 추억이다
나의 박해자로서, 나는 결국
망상에 의해 거꾸러지겠지만
인간이란 본래 죽고도 죽이고도 싶어지는 것
때 묻은 동전 쥐고 지하도에 웅크린 인생이나,
한밤중 제가 때려부순 집을 술 깨어 둘러보다
머리 쥐어듣는 자의 심장은 이미 뭉개져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인간은 죽고도 죽이고도 싶어지고
죽임에도 죽임에도 폭발적인 슬픔의 긴 탄도가 외마디로
뚝뚝 끊어져 있겠지만,
발버둥치는 짐승이 몸속에서 평생을 울었다 한들
결여를 살의로 뽑아내는 건 양아치나 하는 짓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이들은 분노와 절망과 슬픔을,
그리고 위안을 준다
아직은 막장이 아니라는 거
막장이 아니므로, 죽임당한 아픈 생과
죽이고 싸돌아다닌 더 아픈 생 사이의 광활한 모래사막을,
어느 극단적인 바람 속을
부유중인가

그렇다. 아직, 난 막장은 아니다. 결단코 아니리라. 그렇기에 다시금 희망을 꽃피우련다. 여전히 흠모하는 체 게바라의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항상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를 상기하면서. 덧붙여 죽이고 싸돌아다니는 더 아픈 생 사이의 광활한 모래사막을 부유하는 바람 속에 있을 지도 모를 내 자신을 억누르며, 다시금 체게바라의 생을 기억하겠다. 그리고 그가 남긴 조언도.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바치는 시,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 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는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의의 착취자들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이와 동시에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라는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또한 삶의 화두로 삼으면서. 어쨌거나 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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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KZscpgt4q 2014/02/15 03:07

The Birch of the Shadow…

I feel there may well become a several duplicates, but an exceedingly handy record! I’ve tweeted this. A lot of thanks for s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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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만화책'은 새로운 만화 문화를 꿈꾸며 2002년 시작되었습니다. 만화가를 키우는 '새이야기그림학교'를 운영하며, 만화지 <새만화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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