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행한 죄-시인을 석방하라
- 예술사회학. 현재 프랑스에서 박사과정 중 http://blog.daum.net/jayuin666 트위터 @gaLaYoung
아이들이 시인을 보며 미래를 꿈 꿀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강바닥에 시멘트 칠을 하고 지리산을 보며 ‘개발이 덜 되었어’라고 말하는 독보적인 감수성의 소유자가 산천을 헤집고 돌아다니더라도 시인의 가슴을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라면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꿈 꾸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만들지 못해 안달이다. 다가오는 11월 22일 신동엽 창작상을 받게 될 송경동 시인과 진보신당의 정진우 활동가에게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는 것을 보니 이 암울함을 어떻게 떨쳐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 여름, 몹시 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외치던 시인의 모습과 소리가 눈에 선하고 귓가에 아른거린다. 사회를 모른 척 하지 않은 시인이 잘못인가, 사회를 모른 척 하는 사람이 잘못인가. 시가 행동이 되고 행동이 시가 되는 사람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법은 ‘시를 행한 죄’를 시인에게 묻고 있다.
이란 영화 <쓰레기 시인>(2005년)은 시인을 꿈 꾸는 한 젊은 청소부의 시선으로 이란 사회를 보여준다. 실업난이 심각하여 25살의 젊은이는 돈을 벌기 위해 청소부에 지원했고 절망만이 가득한 사회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에 기뻐한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던 시인의 쓰레기를 매일 수거하며 그 안에서 시인이 버린 문장들을 주워 읽으며 꿈을 키운다. 정치적 우울과 경제적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사회에서 이 청년은 그렇게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더 이상 쓰레기 속에서 시가 나오지 않는다. 시인은 자살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정치 속에서 자신의 시가 아무 쓸모 없다고 느낀 시인의 최후 선택이 결국 자살이었다. 거대한 사회에 맞서 홀로 싸우기가 버거운 그들은 스스로 그 괴물 같은 사회에서 이탈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다. 공적 자살.
굉장히 많은 주제를 안기며 그에 대한 학술 논문까지 생산되었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2006년)에도 정치적 탄압에 절망하여 자살한 동독의 한 시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이렇게 시인의 자살은 종종 다루어지는 문제인데 아마 저승에 가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 ‘시인’이란 꼭 ‘시 쓰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슴’을 표현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즉 작품 속에서 그들의 자살은 권력이 ‘사회의 가슴’을 어떻게 탄압하는지 보여주는 장치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나 팔뜨닥거리는 심장이었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쥐어짜며 억압해왔다.
폴 엘뤼아르의 시집 <고통의 수도 Capitale de la douleur>(1926)에서 영감을 받아 65년 장-뤽 고다르가 만든 영화 <알파빌>은 기계화 되는 현대문명과 그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아주 건조하고 메마르게 이야기한다. 시대도 공간도 알 수 없는 배경 속에서 정체 불명의 기계와 싸우는 한 기자의 이야기는 익숙한 주제에 비해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이 알파빌이란 도시에 ‘감성’이란 없다. 오직 논리(라고 주장하는 것)만 있는 이 도시에서는 하루에도 몇 명씩 사형이 집행되는데 죄목이 기가 막히다. 이유는 눈물을 보였기 때문이다. 알파빌에서는 눈물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명령 받은 것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만 있을 뿐 ‘왜’라는 질문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불순분자다. 여주인공 나타샤(안나 카리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모르기에 그 감정도 알지 못하며 ‘왜’라는 단어를 몰라서 이유를 캐묻는 것에 어색해한다. 이 도시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전을 개편해내는데 사전 속의 단어는 날마다 줄어든다. 그들 사회에서 점점 금지 단어가 늘어나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감성을 움직이게 할 만한 단어는 모두 삭제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은 바로 이 언어사전이다. 인간의 사막 같은 감정과 피동적인 삶의 자세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했거나 눈물을 보여서 사형을 당하는 이들이 죽기 직전까지 외치는 것은 바로 ‘시’의 필요성과 위상이다. 마음의 표현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시다. 이 사회에는 똑똑하고 기계적인 존재만 필요할 뿐 시인은 불온하고 불필요하다. 왜냐면 사회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다른 이들에게도 의문을 갖도록 이끄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기에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가슴이 통제 당한 도시는 컴퓨터와 인간의 구분이 없는, 모두가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린 고철도시나 다름없다. 분노하는 심장을 가진 것이 죄가 된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구속 영장은 기각했던 법원이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활동가를 잡아들이려는 모습을 보니 어떻게 해서든 희망버스의 정체에 난도질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히 두 발로 계단을 내려오도록 하기 위해 모았던 시민의 관심과 응원 그리고 분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식과 정의를 외치며 안철수 열풍, 나꼼수 열풍을 만들어 가는 것도 좋지만 시민들의 그 열기가 결국 집약되어야 할 곳은 ‘우리 모두 노동자’라는 인식이다. 사회 속에 온전히 자신을 던진 이들의 구속을 모른 척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쓰레기 속에서라도 계속해서 시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쓰레기 세상이 될 것이다. 왜 시인이 그 투쟁의 현장에 있어야 하는 사회인지를 직시하지 못하고 시인을 가두려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정권에 어여쁘게 보여 한 자리 꿰차고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예술가(?)는 아무리 시민의 원성을 사도 구속되지 않지만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시민과 함께 행동하는 예술가는 구속된다. 모순덩어리다.
사회의 가슴은 어디에서 뛰는가. “심장은 왼쪽에서 뛰는 것”이라던 독일의 전 재무장관 오스카 라퐁텐 Oskar Lafontaine의 말을 되새기자. 시인과 활동가들을 아무리 구속한들 시 쓰는 가슴을 구속하지는 못한다. 심장은 계속 왼쪽에서 뛸 것이다. 뛰는 심장을 증명해야 한다. 이제 시인을 석방하라. / gala












anyboyz 2011/11/20 14:54
사회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죠.
그러나 사회만 있는 시인도 죽은 시인일 겁니당.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빛을,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시인이 감옥에 가는 사회는
이미 죽은 무덤의 사회입니당.
희망은 절대 감옥에 가서는 안된다고 봅니당. 시인을 석방하라~!
aigozina 2011/11/22 19:24
저도 송경동시인을 구속한 것을 보고 분개했는데,,역시,,갈라님이,,송경동시인을 석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