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가 사라진 날

BY : opinion | 2010.04.27 | 덧글수(0) | 트랙백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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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달이 철분약을 지으러 가는 병원과 격주로 한 번씩 책을 빌리러 가는 도서관과 아이가 좋아하는 매콤한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은 개천 건너편에 있다. 하지만 콘크리트 다리를 이용해 개천을 건너려면 천변을 따라 10분 이상 걸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하기에 군데군데 자리한 징검다리들이 급한 걸음을 할 때 요긴한 매개가 된다. 발끝이 젖지 않을 만큼 도도록이 놓인 돌멩이들을 두루미걸음으로 디뎌 건너 약과 책과 아이의 먹을거리를 구한다.

 그런데 검은 머리 짐승은 간사하고도 어리석어, 평소에는 소소한 것들의 고마움을 까맣게 잊고 살다가 잃어버리고서야 아쉬워 한탄한다. 대수롭잖아 뵈는 징검다리에 얼마나 신세를 지고 살았는지는 비가 와 개천의 수위가 높아지는 날에 여실히 느낀다. 물속에 잠겨 사라지고서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듯 환난이 닥치면 세상의 징검다리들은 수면 밑으로 잦아들 수밖에 없다. 하루가 멀다고 경천동지할 사건 사고들이 빵빵 터져주는 지경에 웬만한 근심은 사소한 투정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난세가 나쁜 까닭은 무질서와 착취로 인한 도탄에 있지만, 실로 이처럼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은 것들을 뭉때려버리는 세태에도 있다.

 나는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시시한 개인사에 몰두해 즐겁게 보냈다. 그리하여 이제야 앞집 강아지와 뒷집 고양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같은 걸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구도 그 절절한 사랑을 알알하게 읽어줄 경황이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칠실지우를 하고 앉았다. 내 사소한 행복을 앗아간 ‘대형사건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건주정이나 피우면서 말이다.

 침몰한 배의 함수에 쇠사슬 연결 작업이 재개되고, 야권의 지방선거 연합공천이 무산되고, 방송에서 검찰의 ‘스폰서’ 문화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던 지난 4월20일은 30돌을 맞는 ‘장애인의 날’이었다. 어쨌든 기념행사는 뻑적지근했다. 총리가 참석한 기념식이 거행되고, 법에서 의무적으로 정한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아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는 대기업에서도 초대음악회라는 걸 열고, 생산품 바자회, 체육대회, 국제포럼 등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기념’하는 것이 대체 무언지는 아리송하기만 하다. ‘장애’를 기념한다는 건가, ‘장애인’을 기념한다는 건가, 무슨 ‘날’이니 덮어놓고 기념부터 한다는 건가?

 정작 장애인 당사자들은 4월20일이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자체가 자체 제공하던 추가예산을 받을 수 없어 실제로 기존의 장애수당보다도 후퇴한 장애인연금과, 기업체 입사 서류전형에 합격하고도 일방적인 취소 통보를 받아야 하는 취업 현실과, 사회참여와 자립생활을 가로막는 수많은 법규와 제약을 걷어치우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기념’만 하고픈 사람들은 기념식장에 얌전히 앉아있지 못하고 광장으로 뛰쳐나온 휠체어들을 해산시키기에 바쁘다. 울부짖으며 흩어지는 그들이 바로 작고 약하여 사소하고 시시하게 취급받는 불어난 흙탕물 속의 굄돌들이다. 사나운 빗속에 사라진 듯 묻혀버린 징검다리다.

 그러나 언젠가 폭우가 그쳐 날이 개고 물이 빠지면, 징검다리는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금은 어긋나고 무너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의 낮은 자리를 단단히 지키며 이편과 저편을 잇는 구실은 변함없을 테다. 출가하기 전 태자 싯다르타가 낳은 아들의 이름이 ‘라후라’(장애)였듯, 드러나 뵈는 몸과 마음이 어떠하든 인간이라면 누구도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김별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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